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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0.~2016.02.22. 약속을 앞두고 시간을 때울 장소로 중고서점을 택했다. 책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절판된 도서를 사보자는 생각으로 평소 눈여겨봤던 책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그러자 발길은 자연스럽게 익숙한 작가의 코너로 향하게 되었다. 에쿠니 가오리. 어릴 적 많이 읽었지만 그녀의 책은 이상하게도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가의 책을 다시 읽기로 결심했었고, 이 기회에 한 번 사보자는 생각을 했다. 이왕이면 그 중 가장 예쁜 책이 사고 싶어졌고, 복숭아 빛 양장본 표지위에 베이비 핑크색 커버가 발랄한 이 책을 골랐다. 물론 예쁜 외관이 눈길을 끌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뒤편의 자극적인 멘트가 진짜 결정타였다. “두 마리 고릴라만도 못하다면, 역시 솔라닌밖에 없지.” 무엇이 두 마리 고릴라만도 못하다는 걸까. 그리고 이어서 들어오는 ‘나 연애해. 하고 싶지 않은데. 사실은, 남편만 사랑하고 싶어.’라는 멘트. 아! 불륜이구나. 에쿠니 가오리가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루기에 이번 건 어떤 식으로 다룰지 궁금했다. 그리고, 불륜이라면 막장스럽긴 해도 흥미로운 소재 아닌가. 무뎌졌다.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일들에 많이 노출되었고,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간통죄가 폐지되면서 모 콘돔전문회사의 주가가 급상승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웃어넘긴다. ‘여친’한테 들키니 향수 뿌리지 말라고 ‘누나’에게 강요(?)하는 모 아이돌 가수의 노래도 익숙하다. ‘일부일처제의 모순’이라는 말도, 미친 척 잘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말 미쳐 돌아간다.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테디베어 작가인 아내 루리코와 겉보기에는 건실한 그녀의 남편 사토시이다. 사토시의 열렬한 구애로 만나게 되었으나, 결혼 후 3년이 지난 그들은 역전된 모습을 보인다. 루리코는 그에게 집착한다. 그게 히스테리나 여타 다른 형태로 드러나면 그래도 좀 덜 무서우려만, 너무도 조용히, 눈에 보이지 않게 애원하고 매달린다. 들리지 않게 신음하고 아파한다. 그 모습은 사토시를 조여 온다. 더 압박감을 느끼게 하고, 팔을 벌리지 못하게 만든다. 문을 잠그고 게임을 하는 남편, 그런 남편 곁에 계속 머무르고 싶어 하는 아내. 그녀는 그녀 자신에 대해 ‘굶주려 있다’고 평가한다. 그런 그녀는 하루오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여자친구가 갖고 싶어하는, 루리코의 소장용 테디베어를 양도받기 위해 그녀의 전시회를 찾아간다. 직접 만든 테디베어는 전시용으로만 쓰던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양도한다. 어떻게 보면 이때부터 예외의 실마리가 생긴 것이 아닐까. 그녀는 그에게서 남편에게는 결핍되어있던 ‘열정’을 보았다. 자신의 남편은 절대 하지 않는 일. 그녀는 자신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봐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하고 있었다. 초반부를 읽는 내내 목마름, 메마름, 삭막함 따위가 연상되었다. 사토시는 동창생 모임에서 시호라는 여자후배를 만난다. 시호는 유원지에서 일하는, 어떻게 보면 그가 원하는 ‘덧없어 보이는’ 타입의 여자다. 발랄함과 애교 있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여자. 아내 루리코와는 다른 유형의 여자. 시호와의 만남의 횟수가 늘고 그녀에게 점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여태껏 아내에게 비밀 따위는 만들지 않던 그가 비밀을 만들게 된다. 그는 시호와 호텔방에서 육체적 관계를 맺으며 루리코는 이런 곳에서 자신에게 몸을 맡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2년 동안 관계가 없었던 그 둘은 흔히들 얘기하는 ‘섹스리스 커플’ 73P신기하게도 루리코는, 이것이 자신과 쓰가와 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토시와도, 까맣고 긴 머리를 한 쓰가와의 여자 친구와도 아무 상관없는, 이곳만의 일. 쓰가와 하루오는 루리코에게 기습 키스를 하고, 그녀를 봐왔던 순간부터 줄곧 하고 싶었다는 말을 한다. 화를 내고 싶었던 그녀의 입에서 정작 나온 말은 ‘줄곧?’ 그녀는 하루오와의 감정을 지극히 개인적인, 어찌 보면 예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감정으로 정의 내린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죄책감을 덜기 위한 변명이 될 수도 있는. 98P“You know what I miss? I miss the idea of him(내가 뭘 그리워하는지 알아? 그저 누군가와 함께 있었단 느낌이야).” 루리코는 비디오 대사에 맞춰 말했다. 그녀는 남편만을 사랑하고 싶어 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그 기회를 내주지 않았던 남편이기에 그녀는 하루오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같이 있어주고, 시간을 채워주고, 감싸주고, 안아주고, 기꺼이 육체적 결합을 하는. 그녀에게 가장 결핍되어 있던 무언가를 채워주는 사람이었기에 마음을 내줄 수밖에 없었겠지…라고 이해해본다. 178P~179P“여기 있으면, 옛날 일이 떠오르고 말아.”옛날, 사토시 없이도 아무렇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그래서 걱정이 되나 봐.”“걱정?”하루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영영 못 돌아갈지도 몰라. 그게 두려워서 가는 거야.”“그럼, 못 돌아가면 되겠네.”(중략)“돌아갈 수 없다면, 안 돌아가면 돼.” 마치 어린아이가 때를 쓰는 듯한 하루오의 말은 아리다. 돌아갈 수 없다면, 안 돌아가면 된다니…. 마음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가는대로 하게하고 싶다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배려를 눌러버리는 마음. 처음에는 그저 같이 있어주고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는데 너무 좋아져버려서 가져버리고 싶어진 그런 마음.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오는 알고 있다. 그녀가 돌아가리라는 것을. 195P-197P“미야코랑 헤어질지도 몰라요.”하루오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헤어지고 싶어졌어.”
같은 장소로 돌아가기 위한 아내와 남편의 작은 거짓말
에쿠니 가오리가 잔잔하게 그려낸 연작소설 달콤한 작은 거짓말

냉정과 열정 사이 의 에쿠니 가오리가 결혼이라는 불가사의한 풍경을 특유의 청아한 문체와 잔잔하고 나긋나긋한 화법으로 그려낸 빨간 장화 에 이어 새롭게 선보이는 결혼에 관한 연작소설집이다. 빨간 장화 에서는 결혼하고 10년, 아이가 없는 히와코와 쇼조의 일상을 단편의 형식을 빌려 에피소드 형식으로 그렸다면, 이번에는 비밀과 거짓말로 유지되는 루리코와 사토시 부부의 결혼 생활을 통해 결혼이라는 쓸쓸한 진실에 대한 또 하나의 물음표를 던진다.

결혼 3년 차인 서른 살 테디 베어 작가인 루리코와 스물여덟 자동차보험 계약 처리 담당 사원인 사토시. 이들은 서로의 일과를 시시콜콜하게 다 이야기하지만, 둘은 전혀 대화한다고 느끼지 못한다. 사토시와 둘이 꼭 붙어 지낼 수 없다면 솔라닌으로 동반 자살 하겠다고 다짐해온 루리코는 어느 날, 여자 친구를 위해 자신이 만든 베어 ‘나나’를 찾아다니는 남자 하루오를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사토시 역시 대학 스키부 동문회에서 만난 후배 시호와 사적인 만남는 가지면서 두 사람의 비밀과 거짓말을 점차 늘어나는데…….

이 작품에는 에쿠니 가오리의 전작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났던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다 는 전제가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동시에 묘한 광기까지 더해진다. 아침 7시 반에 집을 나가 하루 종일 회사에서 내근하다 저녁 6시 반에 회사를 나와 7시 반에 집에 돌아오는 단조로운 사토시의 일상만큼이나 삶의 피로가 엿보이는 동시에 초기 작품에서의 청아함이 살아 있어 더욱 독특한 느낌을 전할 것이다.


솔라닌
사랑
굶주림
방울벌레
열정
비밀



거짓말
달콤하다
바꽃